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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랑 해 본 적 없는 이는 내일 사랑을 하길, 또 사랑해본 적 있는 이도 내일 사랑을 하길. 上

별ㅇ 2021. 4. 21. 14:46

:cras amet qui nunquam amavit; quique amavit, cras amet




“있잖아, 내 생각에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는 것 같아. 결론부터 얘기하면.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갑자기?"

정적 속에 던져진 말, 평소와 같이 나란히 앉아서 넷플릭스를 보고 있을 뿐인 우리 둘 사이로 내 목소리가 끼얹어진다. 이것 또한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는 않다. 늘 그렇듯 나는 운을 띄우고, 너는 그것을 외면하려 할 뿐이니까.

너는 꼭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면 눈에띄게 굳어서 그게 마음이 아프다. 그걸 너는 알까, 웃는 얼굴이 아마 너의 무지를 나타낸다. 그래 너는 모르니까 그런 표정을 짓는 거다. 몸보다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그런 얼굴. 너는 정말 투명한 사람이다. 내가 사랑했던 시절부터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거짓말을 잘 못 하고 하면 얼굴에 다 티가 나는 사람이면서 항상 선의의 거짓말을 하려 하는 사람, 그런 중에 또 다정해서 남에게 상처도 주지 못하고, 거절도 제대로 못하는 그런 너는 또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위해 다정한 거짓을 미소로 그린다. 이건 너의 사랑이자 배려임을 알고 있어서 나는 그게 다시 아프다. 마음이 따끔 거리는 주사를 맞은 기분. 이것은 6년 전부터 그랬고, 4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너는 불안하면 항상 내 손을 잡곤 했는데, 너는 지금 뭐가 그리 불안해서 마주 잡고 있는 손이 이리 떨리는 건지, 이미 알고 있는 나는 또 모른 척을 해 줄 수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너는 내 앞에서 또 한 번 무너져 내린다. 용감하고, 지혜로운 네가, 그런 네가 한없이 무너지며 바보 같은 사랑을 위해 내게 바란다. 사랑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건 오늘도 마음이 아픈 일이었다.


우리 뭐 먹을까, 그리 말하며 너는 내 손을 꽉 쥔다. 불안함에 하얗게 번진 손에 나는 오늘도 네게 전해야 할 이야기를 목 뒤로 넘기며 미안하다고 네 등을 다독이며 말한다. 떨리는 목소리도, 흔들리는 표정도, 굳어버린 입꼬리도 나는 사랑하는 너를 오늘도 눈에 담으며 그것을 외면해야만 한다. 네가 행복하려면,

“그런데, 내가 아프잖아. 내가 아파서 네가 아프잖아. 그러니까.”

끝내 네 손이 내 입을 가린다. 버겁다는 듯한 떨림이 손끝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입술위로 닿는 손은 너를 닮아서 따뜻했고, 사랑을 담아서 무거웠다. 어쩌면 너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끝이 나의 끝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바보같이 나를 놓지 못하는 게 그저 배려이고 다정이길 바라는 내가 이기적일 뿐인 거다.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이기적이기때문에 너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뿐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어랑 어떻게 헤어져.”


이기적이게도 나는 물론 알고 있다. 네가 나를 놓지 못하는 건 단순한 다정함이 아닌 나를 향한 사랑임을 알고 있지만, 나도 너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 임도 변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너에게 작별을 고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전할 안녕 또한 뿌리는 같다. 피어난 꽃이 다를 뿐 사랑도, 안녕도 결국 너와 나 사이에서 피어난 사랑이자 안녕이기에 이 사랑이 참으로 아픈 것뿐이다. 우리의 사랑은 참으로 우습지, 너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너를 사랑했을 뿐인데 우리는 아프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프기에 네가 아파 버렸다. 내가 너를 아프게 해 버렸는데도 너는 그저 웃을 뿐이다. 그러면 안되는 건데, 가시가 박히면 빼내야 하고, 상처가 나면 소독을 해야 하는 것인데. 너는 그러지 않는다 우리는 치료를 해야 하는 거다. 그렇기에 네 손을 잡아 내리고 전해야 할 이야기를 전해야만 하니까. 입에 덮어진 손을 잡아 내리자 넌 꼭 종말을 마주한 사람처럼 표정이 굳는다. 그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 종말을 마주하는 것은 나 하나로도 족하다.

“헤어져야 해.”

그래서 둘 중 하나는 살아야지. 내가 죽으니까 너는 살아야지 잉꼬처럼 한 마리가 죽는다고 따라 죽으면 안 되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네가 들으면 아파하겠지만 나는 내가 너를, 세상을 떠나면 나는 네가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 나에 대해 잊을 때쯤, 나보다 착한 사람, 나보다 좋은 사람, 나보다 건강하고 오래도록 네 곁에 있어줄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하고, 자식을 가지고 그런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



내 말에 네 입이 닫히고 사랑이 꺾인 다 이기적인 나는 네가 평생 할 사랑 중에 내게 줬던 사랑이 가장 작은 사랑이었으면 싶고, 그런데도 나를 잊지 않아 주길 바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이별해야 하는 거야. 사랑하기 때문에 안녕을 고해야 하는데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의 다정함에 안녕을 고한다. 네 어깨를 밀고 너는 밀리고,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네게 나는 이별을 고해야 한다.

“알고 있잖아, 무의미한걸”

사랑과 죽음은 항상 붙어 있는 건지, 옛 영웅들도 사랑 때문에 죽어 가는데, 나는 세상에 이름 하나 남기기에도 벅찬 삶을 살았다는 것에 대한 죗값이었을지,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사랑했던 건지 오늘도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하게 후회는 하지 않으며, 너를 사랑한다. 8년 전에 너를 만난 그날부터, 6년간 평생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오늘의 나는 8년 동안 너를 사랑 한 시간만큼 천천히 죽어가는 중이다.



1

너를 처음 만난 건 기억도 흐릿한 어렸을 때, 그리고 그로부터 6년도 더 지난 이후의 중학교의 입학식, 입학하는데 누가 신입생 대표로 단상 위에 올라선 너를 처음 본 날,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서 너를 어렵지 않게 끄집어낼 수 있었다.
이제야 초등학생을 벗어난 어린 나이에 첫눈에 반한다는 의미도 뭐도 잘 알지는 못했지만 확실했다. 그것이 어떤 형태, 어떤 의미의 사랑이었던 나의 첫사랑의 시작은 그때였다고. 몸도 좋지 않아서 삶에 흥미조차 없어서 공부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사람이었던 주제에 네 옆에 나란히 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게, 앞선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꾸벅, 꾸벅 졸고 있었던 탓에 네 반과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너를, 네 기억 속에 흔적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 텐데 너를 다시 만난 그날부터 내 목표에는 네 옆자리가 자리했다.

중학교 때 3년 내내 반도 달라서 얼굴도 자주 못 봤던 관계, 그럼에도 스쳐 지나가듯 너를 볼 때면 이상하게 속내를 들키는 기분이라서 숨어 버리고, 시험 때만 되면 친구에게 물어봐 아침 일찍 네가 먹을지 안 먹을지도 모르는데 네 자리에 찾아가서 넣을까 말까 고민하던 편지 하나 넣어주지 못한 간식거리를 두고 아무도 모르게 나오고, 그런 너는 내 이름도 모르고, 나도 네게 나의 이름 석 자 하나 전할 용기가 없음에도 복도에서 너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 그런 게 나의 사랑이었다고.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됐고, 찬란하진 못해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으며, 보석만큼은 아니고, 남들처럼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 한 들 나에게는 살아갈 희망을 품게 해 준 그런 것이 나의 사랑이었다는 걸, 네게 이야기해주고만 싶었다. 사람으로 구원 삼아서는 안 되지만, 너는 존재 자체로 나의 숨통을 틔워주고 살아있음을 틔워주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어쩌면 네가 내 마지막 사랑이 될 거라는 걸 네게 말해 주고 싶었다.


우리의 정적을 메우는 두 개의 숨소리, 시계의 초침은 쉴 새 없이 나아간다. 우리는 아프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아픈 거라고, 사랑은 열병이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노래하고, 또 누군가는 이야기를 짓는데 왜 사랑은 항상 아파야만 할까, 우리가 아픈 이유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에게는 정답이 없는데 우린 누굴 원망해야만 하는 걸까,

우리는 빗속에서 길을 잃었고, 정처 없는 사랑은 꺼지질 않고, 너는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으려 할 뿐인데, 우리는 왜 이렇게 아파야 할까. 아픈 게 나라서 네가 아프대, 내가 아파서, 나 때문에 네가 아프대, 그렇다면 우리가 아픈 건 전적으로 내 탓이 맞는데 너는 아니래, 네가 아픈 게 나를 사랑해서, 그날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나 때문에 네가 지독한 감기에 걸렸을 뿐인데, 이상하게 너는 내 탓이 아니래. 그럼 우리는 누구의 탓을 해야 하는 걸까, 아무의 잘못도 아니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아픈데. 점점 차가워지는 내 손과는 다르게 따듯한 네 손은 여전히 다정을 품고 있어서, 그 누구의 탓도 하지 못한 채로 식어 가는데, 나는 그것을 무어라 생각해야 할까, 이게 아프지 않은 거라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아픈데. 네가 나 때문에 아픈데, 어떻게 이걸 아무의 탓도 아니라며 웃을 수 있는지,

나는 네 다정 때문에 더 아프다.


우리의 처음은 어찌 보면 단순했고, 어찌 보면 특별했던 것 같다. 그날은 정말 최악이나 다름없던 날이었다. 아니다, 어떻게 보면 최악은 아니었던 날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 조금 틀어졌다고 최악이라 이야기한다면 남 정상의 범주에서 나와 있는 나는 항상 최악이라는 것 같으니 아무튼 그날은 최악이 아닌 조금 특이한 날이었다.

항상 똑같이 찾아간 병원에서 결국 내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고개를 떨구셨다. 항상 기계적으로 검사일지만 알려주던 사람을 16년째, 기억에서는 약 10년째 만났는데 그날따라 선생님은 힘겨워 보이셔서, 어쩌면 예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표정은 기계적인데 검사 결과를 읊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떨린다. 언젠가 기계적이라 뭐라 하니까 내가 무너지면 환자가 힘들어할 거라며 말해주던 것이 생각이 나서, 그래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가 입속의 여린 살에서 피 맛이 맴돈다. 떨리는 목소리로 덤덤하게 나의 끝을 전달받는다. 그 사이에 몸 일부분이 또 말썽이란다. 티가 나거나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이 상태로면 10년도 못 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 얘기를 들으며 들었던 생각은 생각보단 오래 사네... 거나,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네 얼굴이었을 것이다. 수술이 필요한 상태임이 분명함에도 선생님은 쉽사리 수술 얘기를 꺼내지를 못하실걸 안다. 나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사라진 가족보다 나를 더 오래 본 사람이 내가 생활하는 방식을 알고 있는데, 그 수술비를 감당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걸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그 날 따라 그게 혀끝이 너무 썼다. 이럴 때면 정의로웠던 부모님께서 너무 미워지는 내가 초라하게만 느껴진다는 것이, 그것이 너무 비참해지는 기분이어서 알겠다고 말을 전한 후문 밖을 나섰다. 뒤에서 선생님께서 힘내라고 작은 위로를 건넸지만 내게는 닿지 못했던 것 같다. 그냥 딱 이대로 숨고 싶다. 생각을 하는 중이었기에, 그저... 딱...

-툭

1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추처럼 달려버려 점점 느려진 걸음을 옮겨 병원을 빠져나오니 이번엔 비가 내 발목을 잡는다. 비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비는 때때로 안 좋은 기분을 더 안 좋게 만드는 존재여서 이런 날에는 선호하지 않는데, 꼭 이런 날에만 소나기가 내린다. 이런 걸 머피의 법칙이라 부르는 것이겠거니 하며 우산도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6년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10년만큼 비는 차가웠다. 어쩌면 겨울비라서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지만 오늘따라 너무 차가웠다.

“비 맞으면 감기 걸리잖아”

그러다가 봄이 왔다. 머리 위로 떨어지던 빗물이 멈추고, 머리 위로는 다정을 감싼 햇빛이 내려앉았다. 따뜻함에 고개를 들고, 늘 보는 처음 만난 사람을 마주하니 아, 이게 봄이구나 싶더라.

“우산 없다고 그렇게 비 맞으면 내일 힘들 텐데... 그래서... 우리 같은 학교잖아 모른척하기도 조금 그래서...”

넌 분명 나를 처음 볼 것이다. 나야 눈이 항상 너를 좇아서 알 수밖에 없었지만 넌 같은 반이 된 적도 없는 나를 알 리는 만무했다. 그런데도 너는 다정했다. 걱정스럽게 나를 살피는 눈에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그리 생각한 것 같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고, 우린 어른이 되지 않고, 10년이 흐르지 않고. 내가 너를 좋아한 지 2년이 된, 너를 처음 만난 지금. 너에게 나라는 사람이 들어간 오늘 지금 이 시간 이대로 시간이 멈춰서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리 생각했다.

“고마워”

대답이 없는 나의 손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는 네게 내가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다른 말을 네게 전하기에는 너는 나를 모르고, 나는 너를 아는 이 관계는 애매하기만 하니까. 그러니까 네게 전할 말을 고르고 골라서, 가장 작지만, 진심을 담은 지금 당장 네게 전해야 하는 말을 전했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서 닿지 않을까 걱정이 생겼을 때 내 손을 이끄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지금 이렇게 더 네가 잡은 나의 손이 너의 대답이었다. 평소보다 느린 네 발걸음이, 나에게 맞춰 짧아진 보폭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이유 없는 다정에 직격타를 맞고 아파하는 것은 순전히 피해자의 몫임이 분명한데 이 순간에는 너도 피해자였으면 좋겠다. 오로지 감당하기에 벅차서 아플 정도로 강하게 뛰는 심장이 버겁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아, 바보 같은 탄식이 네 입에서 새어 나온다. 그 모습이 웃겨서 조금 웃었던 것 같다. 네가 가진 다정은 그런 것이다. 행선지도 온전치 않으면서 나를 이끈다.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우왕좌왕, 평소와는 다르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내게 나쁜 의도가 아니라 감기 걸릴지도 모른다며, 학교에서 만난 기억이 있어서 이런 날 비 맞으며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는 걱정을 건네는 그런 다정. 그런 네 귀 끝이 붉게 물든 건 신기루였을까, 너는 말을 한참이나 고르고 고르다 이내 결심한 듯 내 눈을 향해 네가 돌아선다. 항상 너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작스레 마주한 두 눈에 귀 끝이 타올랐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시선이 흔들렸을지도, 네가 그때 웃은 이유가 내가 우스워서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서는 귀여웠다고 얘기했지만. 원래 사랑은 눈을 멀게 하는 거니까 아마 그때 우스웠던 게 맞는 것 같다.

“우리.., 그러니까, 강요는 아닌데, 진짜 아닌데... 혹시 밥 안 먹었으면 나랑 밥 같이 먹어줄래? 내가... 친구가 없어서.. 근데 밥을 혼자 못 먹어서....”

되지도 않는 거짓말이다. 전교에서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너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트럭이 넘는데도 넌 항상 급식을 혼자 먹거나 먹지를 않았다. 소문으로는 원래 간단하게 먹는다더라. 내가 그걸 모를 리 없는 걸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그런데도 깜찍한 거짓말을 한다. 그럼에도 난 너에게 속아준다. 우산 밖에서 스며든 비 때문인지 빨갛게 물든 네 귀 때문에 라도, 그 귀가 좋아서. 눈을 보며 얘기하다가 점점 자신이 없어졌는지 서서히 내려가 끝내 땅을 바라보고 있는 네 시선도, 항상 자신 있던 너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네 검은 눈동자와 그보다 더 검은 머리카락이, 그게 좋아서, 나는 네게 속아 넘어간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 뒤에 네 밝아진 표정이 아주 좋아서 나의 끝을 선고받은 그날은, 너에게 나를 처음 세긴 날이었고, 너라는 사람의 이야기 속에 나라는 등장인물이 나타난 하루, 그래서 내 죽음도 뛰어넘게 한, 적어도 그 끝이 오늘이 아니란 게 안심이 되는 최고의 날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작게 웃다가, 가만 눈을 떠 바라본 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너는 나랑 눈을 마주했다. 네가 바라본 네 검은 눈에는 오로지 나만 가득 차 있다는 그 행복감을 너는 알았을까, 어쩌면 그때 붉게 타오르듯 붉어진 얼굴이 너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그리 생각하게 만든다.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었는데 너는 고개를 돌리고, 내 손을 조금 더 편히 잡은 상태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찰박, 찰박, 물에 젖은 걸음 소리가 귀에 울린다. 그 뒤로 하나의 발소리가 하나 더 겹친다.

찰박, 찰박, 찰박

이야기의 공백을 메우는 발소리, 내가 네게 전할 수 있는 말은 대체로 무게가 무거워서 전할 수 있는 게 몇 개 없고, 네가 내게 할 말이 있을 리는 만무하니 어쩌면 이 공백이 정답일 거라, 그리 생각할 때 네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엮이고, 이내 맞물렸을 때에는 손끝부터 타오르는 기분에 정신이 아늑했다는 걸 너는 아마 모르겠지만, 아니다. 이건 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때 바라본 내 앞사람의 귀는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붉디붉어서, 손이 닿으면 화상을 입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네가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꽉 잡은 내 손이 뜨거운 것인지, 네 손에 열이 많은 것인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온도였으니까. 두 사람의 온도가 섞여서 누구의 온도 인지도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우리는 비가 오는 날 서로에게 가는 길을 찾았다, 나에게는 돌아간 길, 네게는 어쩌면 처음 맞닥뜨리는 일이었을까, 어째서 너는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보지 않은 아이에게 그리 다가간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그것이 너의 다정히라 그리 여기고 싶었으니까.

“약은 챙겼어? 상태는 어때? 속은 괜찮아? 멀미약 먹을래?”

“물어볼 거면 한 번에 좀 물어보면 안 돼?”

물어볼게 많은 걸 어떡해, 그리 말하며 채연은 말갛게 웃는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저 웃음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나의 시간은 많이 지나왔는데, 함께일 때는 꼭 시간이 멈춰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주는 사람, 전부 괜찮다, 챙겼다고 얘기를 하니 그럼 안심이라며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다른 친구들은 조심히 운전하라며 이야기하지만,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두가 즐거운 순간이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러 가는 날이다. 어렸을 때부터 유독 바다를 좋아해서 자주 가다가, 부모님의 부재로 한동안 가지 못했던 바다를 간 이후로는 종종 들렸다. 적어도 일 년에 2번은 갔던 바다인데, 이젠 마지막이라는 마무리 중 하나로 남을, 모두의 추억 속에 희미한 잔상으로 남을 장소로 남을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이야기를 한 건 아니고, 그 누구도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예상하고 있는 이야기. 나는 내년이 밝아오기 전에 눈을 감을 것이다. 유독 창백해진 내 피부가, 점점 말라 가는 몸이 그것을 보여줬으니까.

그럼에도 친구 중에서 나의 마지막을 알고 있다는 티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당연하다는 듯 모두가 다음을 기약하지는 않는다. 그게 내 친구들의 다정히다. 나를 위해 미래를 기약하지 않는, 그게 우리의 우정이었고 이 또한 사랑이었다. 그러면서 그 누구도 끝을 이야기하지 않는 모습에 그게 속이 아렸다. 다정히 쓸 정도로 달곰하기 때문에, 난 너희에게 침묵을 유지하며 웃을 뿐이다. 그런 내 손을 잡는 네 손에도 그저 웃으며 깍지를 끼는 것 빼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게 나였으니까. 오늘도 다정한 네 손에 다정하지 않은 온도를 섞어주는 것을 빼면 그 무엇도 해줄 수 없었으니까.

나는 또다시 네 온도에 내 온도를 얹는다, 그럼에도 식지 않는 네 온도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아직 그 누구도 연구해주지 않은 미스터리를 밝혀낼 지혜는 아직 내게 없나 보다. 8년째 너의 사랑을 연구했지만, 아직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했으니, 너만은 답을 찾아 나아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우리 바다 갈래?”

정말 갑자기 네가 내게 말을 걸었다. 분명 학교에서 대화한 기억은 내가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닌 이상 없는데, 아무리 같은 반이라고 할지언정 비 오는 날의 헤어짐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미 내 친구들은 놀란 눈으로 내 책상 앞에 서 있는 너를 바라보고 있고, 이미 모르는 아이들까지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는 존재. 그도 그럴 것이 다정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rub에 두지 않는 네가 한 번도 대화하는 걸 본 적 없는 아이, 몸이 아파서 항상 체육을 빠져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고 희미한 사람, 그런 사람에게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양 귀를 붉히며 말 거는 모습을 주목하지 않을 사람이 어찌 더 있을까 싶긴 하지만.

“그.. 이번에도 강요는 아닌데”
대답이 없는 내 모습에 초조해진 네가 제 뒷목을 주무른다, 긴장했나 보다..., 아랫입술을 축이는 걸 보자마자 작게 웃음이 터져서 키득이며 웃자 당황한 표정의 네가 바라본다. 친구들은 왜 이러냐며 나를 찌른다. 그거에 더 웃자 네가 드디어 웃었다. 나를 보고, 네가 웃었다. 그러면서 가자, 바다 보러. 그리 말하니 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가자 네가 바란다면 몇 번이고 바다를 보러 가자, 네가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걸 아는 것일지, 아니면 너도 바다를 좋아한 것일지, 아니면 갑자기 떠올랐고 그 이후에 내가 떠오른 것일지 나는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바다를 가자. 우리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으니까, 네 기억 속 변덕처럼 얼룩이 남을 나를 위해 바다를 생각해 준 너를 위해서, 우리는 바다에 가자.

언젠가 내가 눈을 감더라도 너와 본 바다는 선명하게 보일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 같이 바다를 가자.

“우리, 바다 되게 오랜만에 온다.”

그런가? 바다에 내려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따라가지 않고 내 곁에 남은 네가 꺼낸 이야기, 감기 기운이 있다는 네 거짓말에 나는 오늘도 속아 넘어 가주며 한 이야기, 그리 추운 날씨가 아님에도 너는 내 어깨에 담요를 덮어준다, 몸에 열이 많아서 담요를 쓸 일이 없는 너는 항상 담요를 챙겨 다니듯 미래가 아닌 과거를 꺼내는 너는 여전히 다정하다. 어깨에 덮어진 담요가 무겁다. 눈을 감으면 그 날의 파도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눈을 뜨면 오늘의 파도소리가 눈에 읽힌다.

친구들은 물을 뿌리고 장난을 치기도 하고, 이따금 우리를 부른다, 그럼에도 공기가 무거운 이유는 너희가 연기하고 있음을 모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너희는 연기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처음에 내 상태를 알렸을 때 울던 너희가 스쳐 지나간고 그 날 이후 우리에게 죽음은 금기가 되었다는 것도, 그 날 이후에 너희는 연극배우를 자처하고 있다. 내 앞에서는 밝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너희의 연기에 속아 줄 수밖에, 거짓말을 못 하는 다정을 품은 너희의 연극은 어찌 보면 지루하고 어찌 보면 우습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다정을, 그 연극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때때로 사람의 눈을 멀게 하니까, 나는 오늘 너희의 연기에 눈을 먼 시각장애인처럼 속아 준다. 너희의 연극의 팬인 내가 돌려줄 수 있는 최대의 애정이다.



“우리 작년에 겨울 바다 못 봤는데”

응, 내 투정 아닌 투정에 네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네 어깨에 고개를 얹으니 머리에 무게에 맞춰 어깨를 낮추곤 담요를 여 매주고, 그걸 다독인다. 매년 찾던 바다를 작년 겨울에만은 바다에 올 수 없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네가 아팠던 날이니까. 내 아픔을 알고도 미래를 기약하던 네게 나는 네 미래를 외면하고 미래를 망가트리고, 우리의 일상에 처음으로 소음을 침범시킨 날. 우리는 그 해에 바다에 올 수 없었다. 너는 그걸 알면서도 내 투정에 그저 웃는다. 우린 모두 일상을 연기하는 배우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도 아프지 않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연기하는 배우,

관객은 없는 그런 연기를 하는 우리는 상처 받은 만큼 무뎌진 걸까, 아니면 가장 큰 아픔에 다른 아픔이 가려진 걸까, 너희의 아픔의 원인은 이번에도 나였다. 아마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죽음 이후를 알게 될 것이고, 너희는 사랑을 잃고 새로운 사랑을 배워가는 미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이따금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너는 어떻게 지금 웃고 있는 걸까? 너희의 웃음을 짓게 하는 게 나일까, 아니면 과거에 머무른 우리의 시간일까. 아니 어쩌면 너희는 있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웃음을 짓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만 너희와, 너의 웃음의 이유가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네 웃음의 이유가 나라면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미래에 웃지 못하는 이유도 나일 테니까, 너희와 네게 내가 생각보다 가벼운 존재여서 금방 털어버릴 과거이길 바랄 때가 있다.

내가 무거운 존재여서 너희가 웃지 못하는 미래. 그 미래는 어쩌면 죽는 것보다 싫다는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다. 아니다, 원래 죽는 걸 싫어한 것은 아니니까 어쩌면 나도 너희 없이는 웃을 수 없는 사람이라서, 너희의 연극이 끝나면 그대로 무너지고 말 사람이 나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도, 모순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는 나라서. 그래서 그것이 싫은 걸 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희만큼 밝지도, 건강하지도, 눈으로 본 것이 많은 것도, 똑똑한 것도 아니어서 잘 모르겠다. 너는 항상 나보고 똑똑하다며 웃었는데 너는 아직도 날 잘 모르나 보다, 네 생각보다 나는 바보 같은데 너는 언제나 나보고 똑똑하다 웃고, 네 정답이 나인 것처럼 웃던 얼굴이 여전하게 기억에 뚜렿하게 남아서, 어쩌면 너희에게 나도 한 명의 배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에 아프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바다에 다시 오자.”

“응, 그러자.”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으니까, 이미 한 번 네 마음을 아프게 한 대가로 이번에는 내가 아프기로 한다.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둘 다 아파질지도 모른다. 너의 미래에 걸릴 오늘의 약속. 우리의 미래를 아무렇지 않게 기약하는 네게 미래를 약속한다. 너는 거짓말도, 연기도 못 하는 나를 위한 희극인. 그런 너라면 내 시간이 멈추었다 한들, 다른 타인이 네 곁에 있다고 한들, 나의 이후에도 나를 데리고 바다에 와 줄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너는 항상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으니까. 몇 번이고 나를 바다에 데리고 와줄 너를 알고 있으니까.

우리 바다에 가자, 너의 기억 속에서 나보다 소중한 사람이 생겨서, 그 사람이 가지 말자고 하기 전까지 우리 같이 바다에 오자.



“같이 밥 먹을래?”

“나랑?”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눈에 띄게 당황한 내 모습에 너의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을 보았다.

“나 급식 안 먹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도 급식 신청 안 했거든.”

“왜...?”

진짜 왜?! 높아지고 커진 내 목소리에 뭐가 그리 웃기는지 너는 웃었다. 복도 한복판에서 소리 지른 내가 어이가 없을 법도 한데 너는 그저 웃는다. 또다시 시선이 주목되고 우리는 주인공이라도 된 마냥 모두의 시선을 받아들이는 두 사람이 된다. 주인공은 정말 너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입을 막으며 주위의 눈치를 보는 나를 보고 너는 또다시 한참을 웃다가 너는 내 손을 잡아 이끌며 작디작은 말을 속삭인다. 이제는 급식을 먹을 이유가 사라졌다며, 너는 나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생각과도 같이 짧은데 너는 생각 이상으로 나의 비중을 넓히고 있다. 그때 모난 마음에 피어난 생각은 우리가 언제 봤다고, 이해가 불가능인 너의 시간을 따라가기는 조금 벅차다. 하지만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벅차기에 나는 너에게 이끌린다. 나의 삶에는 네가 있었지만, 너의 삶에는 내가 없었을 거라 확신을 가졌지만 아직 물어보지는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물어는 봤지만 해답을 받지는 못 했다. 물어보면 너는 언제나 그런 게 있다며 웃어 남기기 일쑤여서 아직도 나는 너에게 나의 의미를 온전히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건 나쁜 게 아니다, 그저 내 생각보다도 큰 너의 진심을 들은 내가 팡, 하고 터져버릴까 봐 네가 또 나를 배려하는 거일 것이다.

“이번엔... 어디로 가?

“이번엔 비밀, 근데 강요는 아니야.”

“웃겨”

어느새인가 편해진 말투, 바다에 가기 전부터 너는 나를 데리고 이미 세상을 넘나들고 있다, 너는 알까, 가족도 어쩌면 남들만큼의 삶도 잃은 뒤 색을 잃은 세상을 마주 했다는 걸, 그런 흑백의 세상에 색을 채운 건 오로지 네 이름 석 자에서 비롯되었고, 네 눈에 비치는 내가 흑백의 순간의 사진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 하나로 나를 가꾸기 시작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을까. 네가 들으면 부담스럽다고 고개를 저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 시절의 나의 삶에는 네가 꽤 큰 비중이어서,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고. 단순히 눈을 마주친 너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너라서, 이 사랑이 너라는 것이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는 알지 못하겠지만, 아닌가? 나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똑똑한 너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생각보다 나를 모르지만, 내 생각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너였으니까.

그래 그때도, 너는 내 손을 놓지 않고 걸으며 전과는 다르게 말소리로 공백을 메꾼다, 비 오는 날과 같은 순간이지만 비 오는 날과는 다른 순간, 그 날 나는 너에게 얼마의 각인이 되어 있던 걸까. 나는 운명을 좋아하지 않는데, 너와 나는 운명이었길 바라면서도, 정작 네 미래에는 내가 없길 바라게 된다.

“앞으로 급식 같이 먹자”

“... 응”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범생인걸 이용해 호감을 사서 나와 급식을 먹는다는 이유 하나로 잠겨있는 옥상의 열쇠를 가져와서 나에게만은 이 문을 허락해주는 너를 봤으니까, 네가 날 보고 웃고 있고, 맞잡은 손의 온기는 여전히 비 오는 날과 같이 따듯했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날이 맑으니까, 하늘이 예쁜데 바람은 선선해서, 그래서 나는 너랑 급식이 아닌 같이 도시락을 먹는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강요가 아닌 부탁에도 너라는 존재는 내게 부정할 수 없이 밀려오는 썰물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이유를 붙여가며 이 상황에 타당성을 찾아야만 한다.

-쿵, 쿵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 두근거리는 소리, 심장 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인다, 마주 잡은 손끝에서도 느껴지는 이 두근거림이 내 것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건 내가 너를, 아니 어쩌면 너도 나를-...


“우리 소풍 갈까?”

“오늘?”

너는 오늘도 갑작스럽다. 특히 같이 살게 된 이후부터는, 아니 원래부터 갑작스러웠던 거였는지, 아니면 나에 대해 알게 된 날부터인지 너는 이따금 갑작스러운 여행을 계획하고, 내게 항상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 늘 노력했다. 옥상에서 다른 지역, 다른 나라, 항상 네가 보여준 것들은 나 혼자선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고, 새로운 것들이었고, 먼 훗날에 추억하게 될 법한 그런 것들뿐이라서 사실 처음엔 당황했고, 이후에는 설렜고, 나중에는 미래를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되는 것이 너의 사랑이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번에도 나는 거절할 수 없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헤어지자며, 헤어질 수 없다고 울며 싸웠음에도 너는 다시 내 손을 잡는데 잡혀주지 않으려 해도 알고 있다, 너는 계속해서 나를 기다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너를 두고 떠나갈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너를 떠나야만 하는 나를 너는 왜 사랑을 해서, 이렇게 아프려고 하는 걸까.

“응, 오늘”

“이번에도 강요는 아니야?”

응, 강요는 아니야. 그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웃을 수 없을밖에 없으려나? 더는 두 사람은 강요인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도 대답도 하지 않은지 꽤 된 상태였으니까. 그저 당연한 것, 너는 강요를 하지 않고, 나는 거절을 하지 않는 그런 게 당연한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해도 아마 너는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알겠어, 잠시만”

그런 너의 다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말을 달지 않고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간다. 예전이었다면 신경 안 쓰고 네 앞에서 갈아입거나 같이 옷을 고르며 놀았겠지만 내가 아픈 뒤로 암묵적으로 두 사람은 같이 옷을 갈아입지도, 서로의 옷을 골라주지도 않았다.

그건 아마도 내가 네게 흉터에 얼룩진 뼈와 가죽만 남은 외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리고 당연하게 다른 사람의 옷을 골라주는 일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너의 준비 운동이기도 할 것이다. 너는 내 것을 같이 준비하는 일상에서 벗어나야 하고, 나는 네가 없을 미래를 준비해야 하니까.

갑작스러운 새로움에서 다리가 꼬여서, 근육이 놀라서 다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준비운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 생각하니까 그나마 안심이 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거라도 나는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그나저나 옷이 문제라면 문제다. 지난번에 밝은 색의 옷은 다 가져다 버리고, 어두운 색채만 남겨 뒀는데. 아무리 신경 쓰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고 한들 소풍에 상복 같은 어두운 옷을 입고 가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옷장을 열었는데

“아,”

나는 또 네 다정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들어있었는지 모를 쇼핑백 하나, 네가 사기에는 분명 부담스러울 상표, 그 안에 들어있는 내가 좋아하던 스타일의 하얀 원피스, 죽어가는 중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스타일인데, 너는 내가 바랄까 봐 라는 이유로 네게 부담스러운 가격의 옷을 사서 넣어뒀다. 내가 평소처럼 꺼내 둔 옷을 입고자 했으면 어쩌면 평생을 발견하지 못했을 다정에 나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속절없이 너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조용히 입을 틀어막고 속을 뱉어낼 수밖에,

소리도 잘 나지 않는 울음소리에 어느새 달려와 나를 안고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몰라서 아프다. 네가 왜 미안할까, 너는 나를 사랑했을 뿐인데, 왜 너는 나에게 미안해할까, 우리는 사랑을 했을 뿐인데,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문제 때문에 이렇게 서로 끌어안고 울어야 하고, 한 명은 다른 사람을 달래야 하는 이런 일상에서 익숙해져야만 하는 걸까. 이런 사랑에 보답조차 못 하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나에게 면죄부를 쥐여주는 네게 미안해서 나는 속절없이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

너는 왜 또 다정해서 나를 울려서 마음이 아파야 하는지 아무도 답을 주지 않는 것이, 그게 우리의 이별의 이유라는 게 어떻게도 이렇게나 우리가 아플 이유가 되는 것인지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이었다면, 차라리 덜 아팠을까 싶다. 죄가 없이 아픈 건 조금 억울했으니까.

“일출 보러 가자!”

“응...?”

너는 진짜 뜬금이 없을 때가 간혹 있었다. 어쩌면 간혹 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날은 중간고사의 바로 전 주말에 걸려온 전화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게 아니었을까, 공부하느라 바쁜 걸 뻔히 아는데 섣불리 응 이라고 대답할 수 없어서 말 사이에 여백이 길어지던 중이었을까, 너는 조금 급하게 말을 이어 붙인다.

“음... 내가 가고 싶어서? 근데 이왕이면 너랑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별론가?”

너는 생각보다 어렵고, 생각보다 뻔한 사람이라서, 이렇게 투명해도 될까 싶을 때가 있다. 이번의 너는 생각보다 뻔한 사람처럼 군다. 내가 대답을 하기 어려워할 것을 알고 있어서, 그게 목소리에 담겨 있으니까 대답을 하기 쉬운 선택지를 건네는 것이다. 그게 너의 다정히라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응 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곤 길고 길던 공허에 안녕을 고한다.

“다녀올게”

그렇게 동이 트기 전, 시험의 전날 오전 3시, 나는 밖으로 향하였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귀랑 코가 빨개진 너는 사랑스러웠고 추운 겨울 날씨는 맞잡은 손에서 냉기를 잃어가는 것이 우리의 추억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다. 이렇게 속전속결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사람이 너라서, 같이 새벽 할증이 붙은 택시를 타고, 언제 예매했을지 알 수 없는 기차의 두 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도착 전까지 사이좋게 서로에게 기대서 꾸벅꾸벅 조는 그런 게,

그게 너의 사랑인 것을 알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같이 걸음을 옮겨서 내린 기차역에서 눈앞에서 흐트러지는 하얀 입김을 보고 같이 웃다가 차가워지기 전에 급하게 손을 마주 잡는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이 과정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아마, 나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좋아해.”

좋아해, 무척 좋아해 마음이 벅차서 터질 것만 같아서 살며시 끄집어내 본 진심은 생각보다 무거우면서 가벼웠다. 고르고 골라서 가장 정확한 단어를 전하고, 입김과 함께 흩어질지도 모르는 지금을 눈에 세기고, 앞장서서 걷는 너의 두 귀가 붉어지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그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해, 언젠가 이 말을 후회하는 날이 올지도 몰라 우리의 관계에는, 어쩌면 나로 인해 우리의 미래는 짧고 너의 과거에만 남아있는 미래로 끝나버릴지도 몰라 우리는, 그런데도 나는 너를 좋아해. 어쩌면 내가 이 마음을 가지는 것조차 죄악이 되는 걸지도 모른다고 한들 그래도 나는 네가 좋았어. 어쩌면 그때의 나는 오늘이 아니라 네게 전하지 못할 진심이 더 무서웠는지도 몰라, 나의 끝이 무서운 게 아니라

너와 미래를 그리지 못하는 과거에 남아있을 내 모습이 더 무서웠던 거야. 너의 짧은 미래에 그에 맞는 짧은 생이라도 네게 남기고 싶었어, 그때의 나는 그랬어.


“너는... 그런 얘기를.., “


순식간에 붉어지는 너의 얼굴, 네 얼굴을 반쯤 가린 너의 손과 두려운 듯 떨리는 동공, 아 그래 사랑은 종말이다. 언젠가 종결 날 우리의 사랑을 닮은 종말. 너는 종말을 피해 뒷걸음질 치고, 종말은 사랑을 따라 걸음을 옮기고. 두려워하는 시선은 사랑을 하는 종말과 닮았다. 그래서 우리는 닮았다. 그리고 누가 그랬잖아



“사랑하면 닮는대.”


찰박 거리는 바다에 네 발이 젖는다. 너를 따르는 내발이 젖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젖은 채로 눈을 마주한다. 네 손에 내 손을 끼워 넣는다.

“우리 지금 둘 다 젖었잖아.”

너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나는 네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 꽤나 비슷하지 않아?”

그리고 우리는 우습게도 정말 닮아졌다. 그게 우리의 사랑의 증명이다. N극과 S극이 붙듯, 우리가 같아진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였다.


“근데 그거 알아? 나 꽤나 오래도록 너 좋아했어. “

“그런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